[칼럼] 쉬운정보로 연결된 바다 건너의 동료들
2026.08.31

지난해 소소한소통은 영국으로 향했습니다. 쉬운정보를 먼저 만들어 온 선배 기관을 만나기 위해서였죠. 언어도, 문화도 다른 곳에서 ‘발달장애인에게 쉬운정보가 필요하다’며 같은 길을 걸어온 사람들을 마주했을 때의 뭉클함은 여전히 생생합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같은 생각을 떠올리고, 같은 활동을 이어왔다는 사실은 몇 번을 되새겨도 신기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반대로, 일본에서 소소한소통을 만나러 한국을 찾아왔습니다. 지난 1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소소한소통은 자각하지 못한 채 세상에 어떤 메시지를 끊임없이 발신하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이번 만남은 그 소박한 발신 끝에 찾아온, 참 다정하고도 반가운 '응답'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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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정보로 연결된

바다 건너의 동료들

 

백정연(소소한소통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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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소소한소통에 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일본 교토산업대학교의 호리카와 사토시 교수였다. 호리카와 교수는 발달장애인의 정보접근권과 참정권을 연구한다며, 우연히 소소한소통이 만든 '쉬운 공약'을 보게 되었다고 했다. 소소한소통은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 한국에서는 발달장애인의 참정권을 보장하기 위해 어떤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낯선 이로부터 온 연락이었지만, 머나먼 이국의 누군가가 우리가 하는 일을 궁금해한다는 사실만으로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이메일로 서로의 관심사와 하는 일을 주고받았고, 지방선거가 치러지던 날에는 온라인으로 만나 조금 더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팅을 마친 뒤 호리카와 교수는 소소한소통을 직접 만나러 한국에 오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가 실제 만남으로 이어졌다. 호리카와 교수와 함께 한국을 찾은 사람은 일본에서 쉬운뉴스를 비롯한 쉬운정보를 만드는 단체 '슬로우 커뮤니케이션'*의 하야마 신스케 부대표와 우치나미 아야코 부대표였다.  

 


슬로우 커뮤니케이션 (바로가기)

슬로우커뮤니케이션은 1996년 지적장애인 전용 신문 《스테이지》 발행을 시작으로 20년 이상 현장 경험을 쌓아온 일본의 대표적인 쉬운정보 전문 기관입니다. “알기 쉬운 정보 보장이 전제되어야 진정한 자기 결정이 가능하다"는 철학 아래, 복잡한 공공·행정 문서의 쉬운정보로 바꾸는 일을 하고 있으며 임직원 대상 의사소통 지원 교육, 당사자 주도형 권리 옹호 워크숍의 활동도 운영하며 발달장애인의 권리 보장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일반사단법인 슬로우 커뮤니케이션




닮은 듯 다른 한·일의 쉬운정보

 

소소한소통 사무실에서 가진 첫 번째 간담회에서는 한·일의 쉬운정보 제작 현황을 나누었다. 어떤 정보를 우선하여 쉽게 만드는지, 쉬운정보 제작을 어떻게 사업으로 이어가고 있는지, 인공지능은 이 일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관한 질문이 오갔다. 발달장애인이 쉬운정보 제작 과정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지, 선거공보물과 투표용지는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이어졌다.


일본과 한국의 쉬운정보는 비슷하면서도, 어느 지점에서는 한국이 조금 더 앞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일본에서 쉬운정보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기관은 슬로우커뮤니케이션이 유일했다. 슬로우커뮤니케이션에서는 4명의 멤버가 활동하고 있지만, 그중 급여를 받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올해로 설립 10주년을 맞았지만, 기관의 지속 가능성을 걱정해야 할 만큼 일본에서 만들어지는 쉬운정보의 양과 이를 뒷받침하는 기반은 충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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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소통도 올해 10년 차가 되었다. 같은 시간 동안 한 사람이 시작한 조직은 스무 명 가까이가 함께 일하는 조직으로 성장했고, 공공기관과 비영리기관 등의 의뢰를 받아 다양한 쉬운정보를 만들어왔다. 발달장애인이 정보 사용자로서 제작과 검토 과정에 참여하는 범위도 점점 넓고 깊어지고 있다. 쉬운정보 제작물의 양과 제작 경험, 발달장애인의 참여 구조만 놓고 보면 한국이 일본보다 조금 앞서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서 있다’는 말을 쉽게 하기는 어렵다. 한국에도 쉬운정보를 안정적으로 만들고 제공하기 위한 공적인 체계는 여전히 부족하다. 발달장애인법에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주요 정책정보를 발달장애인이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작성하고 배포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은 마련되지 않았다. 쉬운정보는 여전히 몇몇 기관과 담당자의 관심, 또는 예산이 있을 때만 만들어진다.


소소한소통이 지금까지 꽤 많은 쉬운정보를 만들었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 사회에 필요한 쉬운정보가 충분하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일본의 상황을 들으며 우리 역시 아주 취약한 기반 위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번 만남은 어느 나라가 더 앞서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자리는 아니었다. 서로가 이미 해온 시도에서 배울 점을 찾고,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무엇인지 함께 확인하는 자리였다. 일본의 상황을 들여다보니 한국이 해온 일의 의미도 보였지만, 동시에 우리가 앞으로 채워야 할 빈자리도 더 분명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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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발달장애인은 투표를 어떻게 하나요?

 

발달장애인참정권추진연대로 활동하는 서울피플퍼스트, 광진피플퍼스트, 성북피플퍼스트와 만나는 시간도 있었다. 한국과 일본의 참정권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모인 발달장애인 10여 명은 일본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았다. 무엇보다 일본의 발달장애인도 자신의 한 표를 행사할 권리를 충분히 누리는지 알고 싶어 했다.


후보자와 정당의 정보를 쉽게 알 수 있는지, 투표할 때 가족이나 지원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투표소에서 장애 때문에 어려움을 겪지는 않는지 질문이 이어졌다. 일본에서 온 사람들은 일본에서도 선거 종사자를 대상으로 발달장애인 응대 교육을 하고 있지만, 실제 투표 현장에서 필요한 지원을 충분히 받는 것은 여전히 과제라고 답했다.


한국의 발달장애인은 참정권을 보장받기 위해 4가지를 요구하고 있다. 후보자의 사진과 정당 로고를 넣은 그림투표용지, 공약을 이해하고 투표할 수 있도록 하는 쉬운 선거공보물, 혼자 기표하기 어려운 사람을 위한 공적조력인, 익숙하지 않은 투표를 사전에 연습해 볼 수 있도록 하는 모의투표다.


일본에서도 이와 비슷한 논의와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발달장애인이 지역이나 투표소에 상관없이 필요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제도로 충분히 자리 잡지는 못했다. 4가지 요구는 특별한 권리를 달라는 것이 아니다. 선거에 관한 정보를 이해하고, 자신의 뜻에 따라 선택하고, 그 선택을 실제 투표로 표현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마련해 달라는 요구다.


투표할 권리가 법에 있다고 해서, 누구나 동등하게 투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후보자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공약을 내놓았는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투표소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필요한 경우 적절한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뽑은 사람이 약속을 지키는지도 이후에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과정이 모두 가능할 때 비로소 한 사람의 참정권이 온전히 보장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발달장애인의 참정권은 아직 투표 당일의 지원 문제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다. 발달장애인이 정치와 선거에 관한 정보를 충분히 접하고, 자신의 생각을 만들고, 선택하고, 선택한 이후까지 지켜보는 전체 과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논의는 아직 사회적으로 큰 공감을 형성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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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온 손님이 아니라 같은 길을 걷는 동료

 

한국의 발달장애인 부모단체들과 함께하는 자리도 마련했다. 한국과 일본 모두 발달장애인과 가족을 위한 정책과 제도를 만드는 과정에서 부모단체가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이날은 양국의 부모단체가 정책을 바꾸기 위해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 지역사회에서 발달장애인의 자립과 의사결정을 어떻게 지원하고 있는지 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국과 일본 모두 발달장애인과 가족을 위한 제도는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제도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한 사람의 삶에 필요한 지원이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여러 제도가 따로 움직이는 바람에 정작 필요한 순간에 지원을 받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쉬운정보도 마찬가지다. 필요하다는 공감은 있지만, 누가 어떤 기준으로 만들고 어떻게 지속해서 제공할 것인지에 대한 책임은 여전히 분명하지 않다.


이틀을 함께 보내며 반가움과 함께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사용하는 언어도, 제도도, 그동안 걸어온 길도 달랐지만 우리가 마주한 질문은 놀라울 만큼 닮아 있었다.


"

쉬운 정보는 누가 만들어야 하는가.

무엇을 '쉽다'고 판단할 것인가.

쉬운정보를 일회성 사업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권리로 만들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

 

이 질문들은 소소한소통이 지난 10년 동안 붙들고 있던 질문이기도 하다. 10년을 붙들었지만 해결되지 않기에, 어쩌면 그동안 이 질문을 우리만 유난스럽게 붙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던 적도 있다. 쉬운정보가 필요하다고 매번 설명해야 했고, 쉬운정보를 잘 만드는 것을 넘어 현장에서 적용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제도를 개선하는 일까지 모두 고민해야 했다. 이 일이 사회적으로 꼭 필요하다는 믿음과 별개로, 때로는 꽤 외롭다고 느꼈다.


그런데 바다 건너에도 같은 질문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넉넉하지 않은 여건에서도 10년 동안 쉬운뉴스를 만들어온 사람들이 있었고, 발달장애인이 선거정보를 이해하고 자신의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는 사람이 있었다. 서로가 찾아낸 답보다 아직 풀지 못한 문제가 더 많았지만, 같은 문제를 바라보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금 든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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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일 한 통으로 시작된 만남은 결국 서로의 일을 이해하고 연결되는 시간이 되었다. 한 번의 방문으로 한국과 일본의 제도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각자의 경험과 실패, 성과를 나누고, 서로의 시도를 알리고, 필요할 때 다시 질문할 수 있는 관계가 생겼다.


쉬운정보가 필요한 사람은 어느 나라에나 있지만, 이 일을 책임지고 지속하는 사람과 기관은 너무 적다. 그래서 앞으로 필요한 일은 잘하는 한 기관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이 일을 함께할 사람을 늘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쉬운정보를 만드는 사람과 연구하는 사람, 제도로 연결하는 사람,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무엇이 어렵고 쉬운지 말하는 발달장애인이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


호리카와 교수는 일본으로 돌아간 뒤, 다시 한 번 메일을 보내왔다. 

 

"우리가 함께 한국과 일본, 나아가 전 세계에 쉬운정보의 확산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처음 메일을 받았을 때만 하더라도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던 이들이, 이틀의 짧은 시간을 보내고 돌아갈 쯤에는 오래전부터 같은 길을 걸어온 동료처럼 느껴졌다. 서로 다른 나라에서 각자 이어온 일은 이번 만남을 통해 서로의 경험을 나누고 함께 답을 찾아가는 일이 되었다. 자신의 자리에서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과의 만남, 그리고 협력이 더 많은 사람에게 이어져, 누구나 필요한 정보를 이해하고 자신의 삶과 사회의 결정에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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